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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설원 (140614)

doriha 2017. 1. 16. 23:55

  임수, 아니 매장소를 처음 보았을 때 린신은 자신이 그를 깊이 사랑할 것임을 알았고, 동시에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랑야각의 각주가 될 자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자 특유의 기민한 감이 얘기하고 있었다. 저 자는 죽은 자이고 다시 살아 돌아 온 이유는 단지 복수를 위해서이며, 그것을 이루면 언제 돌아왔냐는 듯이 홀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므로 너는 그를 사랑하여도 사랑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그렇다고 하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만일 사람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더라면 모든 재앙의 반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자신이라고 해도(린신은 제법 뻔뻔하게 그것을 주장했다.) 감정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야속한 일이었다. 어쩌다가 저런 골칫덩어리를.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장소, 그만 돌아다니고 좀 들어와서 쉬게.

  누가 들으면 내가 반 나절이나 돌아다닌 줄 알겠군.

  머리 굴리는 거나 돌아다니는 거나 똑같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 어쩌면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하겠군.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매장소는 그저 웃고 만다. 그 웃음이 린신의 속을 꼬이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어쩌면 알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고.

  이번 계절이 다 가기 전에 그는 금릉으로 떠날 것이다. 말이 요양이고 제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지, 약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임을 자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드디어 본인이 죽을 자리로 걸어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려강과 견평은 각주께서 말을 너무 심하게 하신다며 뭐라고 했지만, 린신은 그 말이 여전히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일을 모두 끝낸 매장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해버릴 테니까.

  마음에 안 들어. 린신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장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자네… 언제 간다고 했지.

  두 달 정도 남은 것 같은데.

  …꼭 가야 하나?

  린신, 그 말만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아.


  그가 나긋한 걸음으로 와 제 앞에 서는 것에, 린신은 혀를 가볍게 차며 고개를 들었다. 일전의 소년 장수는 홀연히 사라지고 남은 것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병약한 서생이다. 이런 자의 등에 수많은 적염군의 원념과 눈물을 짊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 린신은 매장소와 임수를 같은 사람으로 두지 않았다. 그가 살린 것은 매장소이지 임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임수를 잊지 않고 복수하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린신은 손을 뻗어 매장소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희고 차디찬 손을 보면 그 손을 잡고 싶었고, 잡으면 힘을 주어 부러트리고 싶었다. 얇은 발목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이 역시 사랑일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네를 못 가게 할 수 있어.

  알고 있네.

  자네가 마시는 약을 몰래 바꾸어 평생 누운 채로 살게 할 수도 있지.

  그 역시 알고 있어.

  …내가 발목을 부러트리려 해도 자네는 아무 것도 못할 거고.


  매장소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손을 떨쳐내지도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린신은 그의 시선을 여실히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린신이 그의 손을 놓은 것은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하지만 자네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빌어먹을 인간… 매장소는 소리 없이 웃었고 린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매장소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아니었다. 침입할 수 없는 고고한 설원 같이, 린신은 단지 매장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역시 사랑이다.

  린신은 몇 번이고 그 사실을 수긍했다. 아주 비참할 정도로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