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30 꿈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빛으로 둘러 쌓인 시야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자각몽이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꿈은 꽤나 허무하다. 자각몽이라고 해도 내 몸조차 보이지 않는 새하얀 세계인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공중에 손을 휘저어 보고 발을 움직여 본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남는다. 걷는 것을 빼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니, 그저 우습다. 그러나 나는 하릴없이 계속 걸었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얕은 여울이 소녀의 발목에서 찰박였다. 소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투명한 물 아래, 분홍색 대야 위에 소녀는 발을 담구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벚꽃나무 아래의 소녀는 금방이라도 이지러질듯 빛에 파묻혀 아슬하다. 문득 소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소녀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휘날린다.
“나는 죽었나요?”
소녀가 나에게 물었다. 두 눈을 곱게 휘고 나른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그저 말없이 소녀에게 다가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었을 뿐 대답을 하지는 못한다. 소녀는 그런 나의 손을 끌어 당겨 제 볼을 부빈다.
“나는 죽었나요?”
“……”
“대답해주세요, 나는 죽었나요?”
그래, 너는 죽었단다.
나는 조용히 대답한다. 소녀는 빙그레 웃는다.
“이곳은 천국인가요?”
…아니란다. 이곳은 천국이 아니야.
“이곳은 어디에요?”
너의 꿈 속.
나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 힘없이 손을 떨군다. 소녀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너의 무의식.
“……”
나 또한 너의 무의식 중에 하나일 뿐이야.
소녀는 여전히 나를 보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한 걸음 물러 난다. 빛 속에 어느샌가 나는 우두커니 서 있고 소녀는 울타리 위에 앉아 나를 본다. 벚꽃잎이 휘날린다. 소녀는 무채색의 원피스를 입은 채 나에게 한 걸음 다가 온다.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그녀는 나에게로 가까워진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당신을 알아요.”
바람이 불었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고작 두 걸음인데 어째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겁이 났다. 더 다가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다. 소녀는 다가오지 않는다. 옷자락 위에 손을 올리고 나를 향해 웃는다. 나는 저 미소를 안다.
“기다렸어요.”
……
“아주 오랜 시간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당신을.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다.
“해가 지고 달이 떴어요. 꽃이 피고 잎이 자라 났어요.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졌어요. 또 눈이 내렸죠. 나는 이곳에 있었어요.”
……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녀가 나의 볼을 쓸어 내린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다. 그녀는 어느새 소녀가 아니라 성인이 되어 나를 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그녀와 같은 나이다.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나는 서글프게 그녀의 손을 잡는다. 나는 항상 멀어지고 그녀는 항상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내가 죽었지.
“……”
당신이 보였어.
“……”
울고 있더군.
“…그랬어요?”
지금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고 눈매를 매만진다.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더니 그녀의 눈매는 하릴없이 메말랐나 보다.
참 어여뻤지, 이 벚꽃나무.
“……”
그 아래에 있던 당신도.
“……”
웃는 게 고왔어.
“……”
당신은 그저,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되었는데.
눈매를 매만지던 손을 움직여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결국 마지막에서야.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긴 숨을 내쉰다. 나는 그녀를 끌어 당긴다. 그녀는 여전히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끝이에요.”
그래.
“고마워요.”
……
“사랑해요.”
…나또한.
바람이 분다. 벚꽃잎이 날린다. 그녀가 나를 향해 서글피 웃는다. 나는 그녀의 눈매를 매만진다. 울지 마.
사랑해.
수없는 벚꽃잎이 새하얀 빛에 잠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