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14 낭만을 위하여
며칠 내내 파스를 붙이고 있었더니 몸에 파스 냄새가 뱄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에 다시 파스를 붙였다. 정확히 일주일 동안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고 딱 일주일 동안 앓았는데, 둘 다 다른 의미로 순식간에 흘러가 정신 차리고 보니 남은 건 돈과 육체적 고통 뿐이라 억울하기도 했다. 많고 많은 알바 중에 왜 단기 알바였냐고 의아해하는 부모님한테는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고, 옆에서 금방이라도 말할 것처럼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배지현에게는 여러 번 소리 없는 윽박을 질러야 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출발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별 소용이 있겠냐마는.
고작 이 년 머물렀을 뿐인데 부천의 집보다 서울의 집이 더 익숙하다는 게 이상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시집과 소설책,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노트를 바라보다 숨을 길게 뱉었다. 시선을 돌리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보였다. 정리를 하고 가야하나, 싶다가도 계속 창문 밖을 바라보게 된다. 해가 부쩍 짧아져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챙긴 건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 한 권. 가방 안에 넣으면서도 과연 한 글자라도 쓰게 될까 자문했다. 대답 대신 혀를 세게 씹었다. 희미하게 비린 맛이 났다.
안경을 쓰자 흐릿했던 세상이 또렷해졌다. 검은색 마스크를 귓가에 걸치고, 가방을 멨다. 목적지는 화성. 대책 없는 여행이었다.
서울역에서 지구 정거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 사람은 얼마 없었다. 화성으로 가는 기차 중 남은 기차라곤 11시에 타는 코스모스 1536 뿐인데, 애초에 그 기차 자체가 탑승객이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기차표를 보고 자리를 찾아가려다 표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출구와 가까운 곳에 앉았다. 옆자리도 비어 있어 편하게 가방을 내려놓았다.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혼자서 기차를 탄 것 같았다.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이 넓고 긴 기차를 독차지 한 느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제대한 후 이 년 동안 꾸준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었다. 그것들은 가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쉬웠고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를 쓰는 건 그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년 동안 나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오랫동안 미련을 끌어 오는 건 힘겨운 일이었는데 단 한 순간, 그걸 포기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화가 나고 눈물 날 정도로 억울하면서도, 속이 시원했고, 그 사실이 비참했다. 결국에는 당연한 일이었다며 자위하고 안심하는 스스로가.
시, 더 안 쓴다면서?
예에, 뭐.
술을 따르다 말고 굴러오는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글을 쓰기 위해 대학을 오는 사람 중에서 졸업까지 버티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대부분이 회의감에 펜을 꺾었고, 나 역시 그 대부분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글을 포기했으나 달라진 것 없이 무료한 일상이었다. 휴학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곧잘 말을 걸면서도 별다른 언질은 하지 않았다. 종강총회에서 한 번 쯤은 얘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으므로 이어지는 말 역시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 힘내라. 포기하는 사람이 한둘이냐. 다른 거 찾아보면 되지. 지루하다 못해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말들.
앞으로는 뭐할 거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길게 숨을 내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문득 해야 할 행동을 잊은 사람처럼 망연한 느낌에, 뒷목을 쓸어내리다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는지 이야기는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다른 사람에게 이미 들은 이야기였으므로,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뒤늦게 도는 취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째서, 이토록 막막한 기분일까.
잠깐 잠이 들었는지 몸을 바로하고 밖을 바라보니, 온통 송전탑과 나무, 그리고 별 뿐이었다. 저 중에 화성도 있을까. 우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했으므로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하는 생각 하나로 출발한, 대책 없는 여행의 목적지. 지구 정거장까지 10분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연거푸 울렸다. 그제야 새삼스럽게 지구를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렸을 때는 화성에 외계인이 있는 줄 알았고, 그곳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조금 웃음이 났다. 열차가 멈췄다. 밤 공기가 그새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오랜 만에 찾아간 부천의 집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야 두 분 다 직장에 나가셨을 거고 동생 역시 허구한 날 놀러 다니기에 바쁘니 오늘 역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비스듬하게 놓인 배지현의 신발을 바라보다 강아지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배지현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불퉁해보였다.
휴학했다며?
배지현은 고사하고 부모님한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을 어째서 알고 있는 걸까.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가, 곧 고등학교 동창이자 동기이기도 한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일전에 술을 마시며 흘리듯 남겼던 이야기를 귀신 같이 잡아내 배지현에게 얘기한 모양이었다. 어쩌다 얘기가 나왔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 그렇다고 해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얼굴 보자마자 대뜸 하는 소리가.
발뺌 할 생각하지 마. 지호 오빠한테 들은 거니까.
내가 언제 발뺌을 했다고.
안 그래도 매서운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시선을 피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랑 아빠는 모르는 눈치던데.
얘기를 안 했으니 모르시겠지. 얘기했냐?
아니.
하지 마.
내가 왜? 휴학 왜 했는데? 바로 졸업한다면서?
…….
시 안 쓸 거야?
모자를 벗고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했다. 욕을 하는 대신 볼 안쪽을 씹자 조금 아연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랜 만에 찾아온 집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는데, 지현과 얘기하다 보니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피로감이 머리 위로 그늘을 칠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배지현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건지.
나 여행 갈 거야.
충동적으로 내뱉는 말이 퍽 자연스러워 아주 당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그러기 위해 휴학을 한 것처럼. 오는 길에 버스에서 보았던 광고가 생각났다. 평생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붉은 별.
화성으로.
배지현의 표정은 이제 '저게 미쳤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분이 아주 약간 유쾌해졌다. 모든 일의 계기는 의외로 사소하고 일상적이다. 화성을 가는 일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역의 자동문이 열리면 나오는 히터 바람을 맞고 있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색에 슬쩍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마스크를 아래로 내리고 숨을 내뱉자 뿌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이제 뭘 할 거냐는 물음에도, 시를 쓰지 않을 거냐는 물음에도 답하지 못했다. 그 대신 화성에 가겠다는 엉뚱한 결론만 튀어나왔다. TV나 인터넷에서 몇 번이고 보기만 했을 뿐 그다지 관심은 없었는데, 막상 벽에 부딪히자 믿지도 않던 신을 찾는 셈이었다. 언젠가는 신도 손에 잡을 수 있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르지. 화성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본가에 짐을 풀고 자세히 찾아보니, 썩 나쁜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지구를 떠나 우주로 여행을 간다는 건. 몇 개의 행성과 무인 정거장을 거쳐 가면서 도달하는 곳이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화성이라는 것도.
기둥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한 개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