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09 편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나는 부풀어 오른 커튼 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화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영화의 아주 처음이자 클라이막스였는데, 떠올리자마자 그 영화에 가라 앉은 감정이 전해지면서 가슴이 무거워 지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머리를 비웠습니다. 빗소리가 들렸어요. 솨아아, 하는… 소리로 밖에 형용할 수가 없는… 그런, 아, 폭포소리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따금은 탁, 토독하는 소리가 들리었고 찰박하는 발자국소리도 들렸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소리에요.
가만 펜을 내려놓고 허리를 세워 밖을 바라 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빗줄기는 규칙적인 듯 불규칙적인, 밤, 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그런 밤.
안 쓰던 노트 속에는 과거의 내가 있었어요. 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서글퍼졌습니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몰랐겠지요. 어쩜 이리도 불운하고 불행한지. 미래를 볼 수 없음을 감사히 여겨요. 부러 펜을 들고 그 제목을 꾹꾹 눌러 썼습니다. 감정을 누르듯, 손에 힘을 주고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글씨를 만들겠다는 것처럼. 정신 없이 글자를 써내리니 기억은 퇴색되었으나 감정은 어찌나 생생한지.
나는 부쩍 우울합니다. 혼자 파고들 수록 감정은 쌓이고 쌓여 다른 것을 해보아도 해가 지면 손을 놓고 넋을 놓게 되어요.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저 허량합니다.
비가 그쳤다.
사각거리는 소리도 멈췄다. 고개를 돌리고 밖을 보았다. 글은 끝나지 않았으나, 아니 애시당초 끝이 있을까 싶지마는, 펜을 완전히 내려 놓았다. 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니 끝이었다. 아무 관계 없으니 그것은 그저 오기에 가깝다. 어차피 보내지 못할 편지인데. 펜은 힘없이 굴러가다 멈추었다. 잉크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차라리 전부 번졌으면, 생각하며 이불을 덮었다.
다시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구름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 같다… 비를 쫄딱 맞는 기분이었다. 착각이었다. 그러나 선명했다. 빗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몇 번이고 고민했다. 찢을까… 찢어버릴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저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던져 버릴까. 달큰한 설탕덩어리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상상하며 허하게 웃었다. 펜을 집어 든 것 자체가… 오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펜을 들어서, 글을 쓰는 것이, 그래 거짓을 읊어내는 게… 그것 자체가.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콰쾅, 소리와 함께, 곧내 번쩍, 하는 빛이었다. 비가 쏟아졌다. 금세 그치지 않을 비였다.
…감정이 쌓이면 그것은 그저 독이 되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몰라도 속에서 쌓이는 것은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이 홀로 있는 것은 나에게 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독을 물에 타 마신다면 이와 같을까.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고 찾아가는 이도, 마찬가지라서, 마치 이 세상에 외따로 남은 것 같습니다. 스탠드 불이 위태로운 밤입니다. 밤, 아니 새벽이라고 해야 겠군요.
찢을까… 찢어버릴까.
과거의 나는 참으로 행복했던 모양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행복했을지.
이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나는 꿈을 꾸는가.
새벽은 참으로 고요해요. 조용하지요. 주위에 아무도 없어 더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벌을 받는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합니다, 어쩌면 수백번을. 과거의 나를 더 이상은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문하면 돌아오는 건 그저, 그저 웃음 뿐이라지요. 물기 젖은 그 웃음 말입니다.
거짓을 읊을 수가 없었다. 펜을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을, 참는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적어간다. 정녕 이보다 더 미련한 자가 있을 수 있나. 울음이 터져 차라리 글씨가 번지기를.
아스라이 기억나는 것은… 반짝이는 불빛과, 귓가에 속삭여지던 그 달콤한 목소리들과… 아, 그 뿐입니다.
차라리…
미래를 알았다면 내가 살았을까요?
…비는 그칠 생각을 않는다.
해가 떠있을 때에는 애써 과거가 무슨 소용이람? 그렇게 중얼거리다가도 해가 지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 몰아치는 감정들, 그리고 희미한… 희미한.
쏟아지는 빗줄기가 거셌다. 마치 장막을 두른 것 같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다가도 곧내 평정을 유지한다. 잠시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건조했다. 살갗에 달라붙는 공기는 잔뜩 물기를 머금어 무겁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람도 불어요. 천둥번개는 아까가 마지막이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비는 언제쯤 그칠까요? 그치기는 할까요?
소리가 잦아 들었다. 바람이 멈춘 모양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펜이 다시 테이블을 굴렀다. 그러니 끝이었다… 끝이 아닌 끝이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밤,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