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24 불
1.
불에 타 죽는 꿈을 꿨다.
아주 슬프고 불쾌하고 난잡한 꿈이었다. 불에 타 죽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후의 무언가 때문이었는데 그 전은 흐릿하게 잔상으로만 남아 있으면서 짜증나게도 그것은 이토록이나 선명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나는 가족들에게 차라리 같이 죽자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수긍했고, 나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바닥에 누웠다. 눈을 감고 괜찮아, 라고 동생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이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불은 보이지 않았으나 넘실거리는 온기는 선연했고, 고통은 없었으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와 불이 닿는 느낌만은 분명했다. 나는 내가 불에 타 죽었음을 알아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은 후, 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그것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바로 다음 장면은 꿈, 그러니까 꿈 속의 꿈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꾸는 꿈. 나는 누추한 옷차림에 낡은 모자를 쓰고 울면서 허겁지겁 들어와 엄마에게 동생은 어디 갔느냐 물었고,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병원에 있다고 했다. 엄마를 껴안고 방 안에 들어가 아빠를 껴안았다. 계속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꿈이라서 그럴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넷 중에 나만 죽었다. 나는 그것이 원망스럽기보다는 후회스러웠다. 내가 죽었고,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죽음이 축복이었으나, 나의 죽음이 나를 아는 사람에게는 아닐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원래 있던 것을 바꾸면 안 되겠구나. 나는 아빠를 껴안으며 처음으로 죽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가족들에게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을 남겼구나. 그것이 죽음보다 더 괴로웠다.
2.
꿈에서 깨고 한참 천장만 바라 보았다. 나 뿐인 집 안에는 비 오는 소리가 제법 소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몇 시간을 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아팠고, 기분이 뒤숭숭하다 못해 최악에까지 이르렀으며, 그에 덩달아 공기는 무겁고 또 습하다는 게 중요할 뿐. 침대에서 기다시피 나와 소파에 앉았다. 비 오는 소리에 희미하게 물 웅덩이가 찰박거리는 소리, 차가 그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좋지 않은 날씨였다. 꿈의 내용이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차라리 빨리 잊고 싶은데, 유독 이런 것만 기억에 생생하다.
결국 또 다시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새삼 꿈을 곱씹다가 진저리를 치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인다.
[엄마 나 꿈꿨어]
단조로운 문자는 별 거 아닌 것을 말하듯 일상적이었지만 내 머리는 평소보다 배로 어지러웠다.
[무슨 꿈?]
[이상한 꿈]
[뭔데]
불에 타 죽는 꿈… 이라고 쓰니, 뭔가 유치하고 치졸해 보인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를 정처없이 배회하다 결국 힘없이 떨어졌다. 변명하듯 [근데 나만 죽었어]라고 한 통 더 보냈다. 잠깐의 정적 후, 휴대폰이 또 진동을 울린다.
[으이구 개꿈]
[밥 먹어 계란후라이 해서]
그런가, 진짜 개꿈인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게 당연하고, 어쩌면 내심 바랐던 일이었는데도 가슴 한 켠이 허했다. 괜히 눈두덩이를 매만지다 휴대폰을 저만치로 던져버린다.
3.
영화를 봤다. 이렇다 할 교훈도, 감동도 없는 오락 영화였다. 시간이 너무 붕 뜨고 찝찝한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본 것이라 오히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검은 배경에 조그마한 하얀 글씨가 규칙적인 속도로 올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귀가 아프다. 몸도 좀쑤시는 것 같다. 1시간 반동안 움직이지 않고 영화를 본 결과였다. 천천히 영화의 내용을 곱씹으며 메모장을 켰다. 재미는 있었지만 액션 씬이 여러모로 아쉬웠고… 하지만 오락 영화 치고는 굉장히 좋음. 웬만한 영화를 전부 다 재미있게 보기 때문에 그리 도움 되는 리뷰는 아닐 것이다. 이어폰을 빼니 잊고 있던 빗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다.
장마는 어느새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라고 뉴스에서는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날씨가 오락가락하고 비는 대부분 내가 일어날 길이 없는 이른 오전에나 쏟아지기 때문에 별로 체감은 하지 못했다. 45일. 자그마치 한 달 반. 인터넷 뉴스의 호들갑스러운 제목을 보며 작년은 어땠더라, 기억을 되짚었다가, 새삼스레 떠들썩했던 폭풍이 작년 일이었음을 깨닫고 기억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니, 제작년이었나? 모르겠다. 기억은 워낙에 변덕스럽고 마구잡이로 섞여있기 마련이었다.
오후 6:17. 얼마 안 있으면 엄마가 온다. 개꿈…인가? 나는 꿈에 대해 말할 사람이 필요했다. 제법 과열된 컴퓨터를 끄고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빗소리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들렸다. 잘 들으면 감미롭지만, 어떻게 들으면 한낱 소음으로 밖에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한참 의자에 앉아 청각을 곧두세우다 결국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여전히 귀가 욱씬거렸지만, 그마저도 조금 있으면 가라 앉을 터였다.
4.
저녁의 카페는 낮의 카페보다는 사람이 적었으나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잔잔하게 깔린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의자를 끄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한 시간 내로 갈게]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창이 뜨자마자 폰을 엎어 놓고 눈 앞의 상대를 완전히 바라본다. 높게 묶은 머리가 평소 같지 않아 낯설었다. 귀찮다고 푸르고 다니면서 웬일로 묶었나.
“더워서 묶었어, 더워서.”
“별 말 안 했는데.”
“네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 이상해?”
“그건 아니고…”
미리 시켜놓은 모카라떼는 시럽을 넣어도 여전히 씁쓰름하다. 이 정도의 씁쓸함은 괜찮지, 싶어 한 번 더 입에 머금고 빨대의 끝을 씹었다. 이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언니는 그걸 물끄러미 보다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연다. 진동벨을 두드리는 손길이 규칙적이다.
“왜 불렀어?”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언니, 내가 오늘 꿈을 꿨는데. 로 시작한 말은 나름대로 규칙적이고 차분했지만 다소 횡설수설하게 이어졌다. 말재주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꺼냈나? 그래도 얘기할 사람이 이 사람 밖에 없는데. 모카라떼를 담은 컵에서는 물방울이 굴러 떨어져 내 손에 맺히기를 반복했다. 너만 산 게 아니라 너만 죽은 거였어? 조용히 묻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꿈일까? 묻는 것은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지난 번에도 말했지.”
뭘?
“네 잘못은 없어. 네 잘못이 아니야, 알겠어?”
“……”
“왜 그렇게 널 미워해. 네 탓이 아니야.”
그런가. 그런 꿈인가. 단호하면서도 나를 안쓰러워 하는 표정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래서 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손을 계속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본다. 언니는 더 이상의 말없이 내 손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울지 않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 있던 것을 바꾸면 안 돼. 왜 내가 죽었을까. 원망이 아닌 후회에 가까웠던 말들.
혀끝이 문득 모래를 머금은듯 퍼석했다. 그게 정말 옳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