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801 [이연수] 봄
a. 1997년 12월 6일, 서울에는 눈이 왔다.
b. 나는 김이 뿌옇게 서린 창문을 한 번 쓸어내리고 그 차가운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 축복 받는 몸이라지만, 아무래도 이번 겨울은 그 몸마저 외면할 정도로 힘겨운 추위인 모양이다. 안에 티셔츠를 두 세겹을 껴입고 패딩을 입었는데도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걸 보면. 실내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으나 실내에서 히터를 틀어주지 않는 병원은 분명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 없다. 아, 물론, 환자의 건강이라던가… 그런 건 이해하지만. 눈을 두 어번 깜박이고 괜히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워 놓은 창문의 뿌옇게 김이 서린 곳은 어느샌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그 옆과 차이가 없다. 다시 한 번 문지를까, 생각하다가 감흥없이 고개를 돌린다.
“아빠.” “…응?”
깜빡 졸고 있다가 내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드는 아빠의 모습이 퍽 우습기도 우스웠으나, 곧 보이는 퀭한 얼굴에 웃음이 쏙 들어갔다. 걸음을 옮겨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들어가 쉬어요. 안 그래도 며칠 내내 야근했다면서.” “괜찮아, 아빠 아직 버틸 수 있다.” “방금 전까지 졸던 사람이 누군데.” “하하…”
웃음으로 떼우기는, 따갑게 쏘아 붙이려다 한숨을 쉬며 그만두었다. 고집이 센 건 우리집 유전이다. 괜찮다, 고 말한 이상 아빠는 아무리 말해도 집에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 나오면 깨워줄 테니까, 눈 붙이고 있어, 그럼.” “너는 안 피곤하냐?” “응, 별로.”
빙그레 짓는 웃음을 물끄러미 보던 아빠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패딩을 이불 삼아 의자에 몸을 뉘였다. 나는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만치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시계는 분명 정각이 조금 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픽 짓는 웃음이 어딘가 허무했다. 오늘은 12월 6일, 내 열 여섯 번째 생일. 그리고 엄마의 네 번째 수술날.
…어느샌가,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별 걱정 없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엄마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번 생일에도 엄마가 못 챙겨줘서 미안해, 라는 가냘픈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수술 잘 끝났으면 됐지 뭐, 라고 대꾸했다. 꼭 잡은 엄마의 손은 마르고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다. 그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이미 생일 축하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 일이었으나, 적어도 끔찍한 날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반 병실로 엄마가 들어가, 이어 투여되는 진통제에 고른 숨소리가 울리고, 아빠도 돌아 갔다. 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자처했다. 어차피 곧 간병인이 오겠지만 짧아야 한 시간 후일 테니까. 움직일 기력도 없고, 긴장을 했었는지 엄마의 편안한 얼굴을 보니 온 몸이 쑤시고 피로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눈을 느리게 끔벅인다.
“엄마.”
들릴 턱이 없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살아줘서.”
이번에도 무사히 생일 축하한다고 해줘서, 고마워.
c. 해림 중학교 바로 옆의 해림 고등학교로 가는 거라 별 다른 감흥은 없으나 새로운 교복과 새로운 환경은 어쩐지 낯설다. 한참의 고민 끝에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싹둑 잘라버려 적응하기 힘든 단발을 매만지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넥타이로 다시 목을 조이고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잘할 필요는 없으니까, 중간만 하자. 눈에 띄지 않게, 문제 일으키는 것 없이.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이래 계속 생각하는 것을 입 안에서 다시 굴리고 숨을 훅 내쉬었다. 해림 고등학교 1학년.
“다녀오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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