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03 해적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요새 하도 잠잠해서 몸이 좀 쑤시던 참이었는데.
아니 아직도 못 들었단 말야? 자네는 귀를 아예 닫고 사는 건가? 아님 귀지로 꽉 막혀 못 듣는 건가?
아, 내 귀 안은 깨끗하니 자네 머리나 걱정하게. 이가 득실득실해서는!
중얼거리는 A의 목소리에 I는 대꾸없이 눈을 흘리고 애꿎은 술병만 쾅, 소리내어 내려놓았다. A가 그 소리에 퍼뜩 놀라 I의 멱살을 잡을 듯 굴었으나 그도 잠시, 희번득하니 그들을 주시하는 술집 주인장의 험악스러운 얼굴에 손은 슬그머니 내려가고 두 눈만 부라린다. I는 못 번 척 술병을 주둥이채 속에 들이붓고 술값은 제가 냈는데 왜 마시기는 자기가 다 마시냐며 윽박지르는 A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술집에서도 제일 값이 싼 데다가 주인장이 물을 섞어 놓은 것이 분명한데도 취기가 대번에 확 몰려 왔다. 휘청이는 시야를 바로 잡은 I는 언제 밉살스럽게 굴었냐는 듯 사내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역시나 반쯤 눈이 풀린 A가 곧 얌전히 허리를 숙인다. 두 남정네의 바로 옆 창문에서 철썩, 흐릿한 파도소리가 울렸다.
자네의 그 더러운 귓구녕이나, 내 머리나 알 바가 아니란 말이야. 응, 알겠나?
그래그래, 그 소문. 어떤 지랄맞은 소문이길래 그러나?
퍽 비밀스레 어깨 동무를 한 I가 목소리를 한 결 더 낮추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소문이 뭐냐면 말이지…
해적 퀸 로즈가 돌아왔다네.
철썩, 다시 울려 퍼진 파도소리는 조금 전의 그것보다 더 위협스레 모래사장을 휩쓸었다.
***
바야흐로 해적 무법 시대, 바다를 휩쓸던 해적이 육지에까지 그 손을 뻗쳐 제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귀족, 심지어는 왕족까지도 협박하는 이 시대에, 모든 해적이 함부로 손 대지 못하는 존재가 딱 하나 있었다. 숭배하고 두려워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해적들의 군림자, 그들 위에 당당히 서 진정한 해적이라 불리우던 사람. 그 어떤 해적도 그녀, 그리고 그녀의 배-프시케의 저주-에게 도전하려 하지 않았고 칼을 내밀지 못하였으며 총을 겨누지 못하였다. 적어도 5년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바다 위에 군림하고 해적을 지배했다. 바다 위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자취를 감추고 바다는 이전보다 더 거세게 날뛰었다. 해적들은 사라진 그녀에게 침을 뱉고 모욕했으나 여왕의 징표와 뿔뿔이 흩어진 선원들만 그녀가 존재했음을 알려줄 뿐, 정작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해적들이 그 징표를 가지기 위해 칼을 겨누고 피를 흘렸다. 모든 해적들을 다스릴 수 있는 자의 징표.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쳤으나 그 누구도 퀸의 자리를 채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 한 사람, 캡틴 로즈를 빼고.
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선판 위에 올라선 그의 앞에는 거적데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챙 넓은 모자를 써 얼굴을 가린 이방인과, 그를 위협스레 둘러 싸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원들이 있었는데 이방인은 홀홀단신으로, 더군다나 아무 무기도 없이(적어도 겉은 그렇게 보였다) 와서는 대뜸 ‘징표를 얻으러 왔다’고 말한 자였다. 허를 찌르다 못해 얻어 맞은 듯 그를 포함한 다수의 선원들이 그 자를 잡기는커녕 다소 신기하다는 얼굴로 이방인을 지켜 보았다. 칼이 징표를 가진 건 맞았다. 그리고 실상 케케묵은 관례상 징표를 얻으러 온 자는 건들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긴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이방인을 보던 칼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정체와 소속을 밝혀라.”
“싸우는데 그렇게까지 필요 있나, 애시당초 나는 징표를 가지러 온 거지 당신한테 자기 소개 하러 온 게 아니라고. 대머리.”
“뭐, 대머리 아저씨?!”
“세상 많이 달라졌네, 대머리 독수리가 해적, 더군다나 징표를 가지고.”
“대머리 독수리?! 이 미친놈이…!”
울컥하는 칼의 뒤로 참지 못하고 터진 웃음소리가 퍼졌으나, 날선 그의 눈빛에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모자 아래 어렴풋이 드러난 입매 또한 매끄럽게 올라가 있다. 칼은 이를 갈았으나 선내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말하는 꼴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데, 자비를 베풀테니 애꿎은 목숨 버리지 말고 가라. 징표는 너 같은 애송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퀸 로즈는 스물에 모든 해적 위에 군림했어. 물론 스물 일곱에 자취를 감췄지만.”
“감히 누구라고 네가 그 이름을,”
“어머, 아직까지 그녀를 숭배하는 머저리가 있다니 놀라운데.”
“아니, 어디서 계집이 해적선에 탄 거야!”
“이봐, 당신이 존경해 마지 않는 그 캡틴 로즈도 계집, 어이쿠야.”
칼을 빼어 들고 달려드는 그의 기습 공격에 이방인, 여자는 아차한 얼굴로 몸을 숙였다. 그러나 모자까지 칼을 피해가지는 못해 아래 숨겨진 붉은 머리가 너울치고 반으로 갈라진 모자는 힘없이 선판 위에 널부러진다. 햇빛 아래 드러난 장난기 어린 얼굴은 척 보기에도 어려 보였다. 징표를 얻기 위한 싸움은 일대일, 원하는 자와 가진 자의 대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암묵적인 규율. 선원들은 알아서 몸을 피하며 척 보기에도 한쪽이 우세적인 싸움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위협적으로 날아드는 칼날을 몸을 옆으로 제끼고 피한 여자는 선원 하나에게서 칼을 빼어 들고 상자를 짚은 뒤 테이블을 박차고 올랐다. 선판에 박힌 칼을 빼어낸 칼은 곧장 몸을 돌려 여자의 칼을 받아낸다. 휘어진 날에 남색 손잡이. 여자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검을 밀어냈다.
“증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건가? 꽤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야.”
“닥쳐라!”
바로 옆으로 날아오는 검을 찰나 피하고 사내의 발을 즈려밟는 동시에 그 뒤로 향한다. 정확하고 재빠르며 그 목적마저 확실한 행동이라, 칼은 고개를 돌릴 수도 없이 옆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침을 삼켰다. 보통 칼잡이의 실력이 아니다. 쉽게 볼 애송이가 아니라, 이건…
“간만에 운동하니 즐거웠어. 어쩜, 증표도 많이 변했나봐. 이런 자를 선택하고.”
혀를 차며 조롱하는 목소리에도 쉬이 발끈하지 못한 채 숨을 골랐다. 방심하는 듯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언제 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럴 수 있는 실력이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원들 사이로 혼란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패자는 승자의 선택이 무엇이든 순응한다. 설령 그 끝이 죽음, 혹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지라도.
“이봐, 퀸의 증표는 승자가 갖는 게 맞지?”
“…증표가 허락하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죽어.”
“아, 그건 걱정 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칼은 고개를 재껴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죽은 듯 고요했던 징표가 거세게 진동하고 있는 탓이었다. 목소리 치고는 그다지 젊지 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칼은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열리는 지도 모르고 징표를 풀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칼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그리고 눈 아래의,
“이거 원래 내 거거든. 실수로 두고 간 건데 징표니 뭐니, 나참. 시끄러워서.”
검은색 장미. 명실상부한 퀸 로즈의 표식.
캡틴 칼은 그것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새로운, 그리고 유일무이한 군림자에게 경배를 표했다. 난간에 걸터 앉아 흡족한 표정으로 가볍게 진동하는 징표를 바라보던 로즈는 비로소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 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 아래 깔린 묘한 위압감을 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그럴 생각조차 않는 오로지 그녀 만의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징표를 칼의 앞에 던지고 나른히 말했다.
“아직은 네가 주인이니까 모든 해적들에게 알려. 이 몸, 캡틴 로즈가 돌아 왔다고.”
바야흐로 퀸 로즈의 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