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40420 자온 조각글

doriha 2014. 9. 25. 15:23

  소담히 핀 꽃이 온통 붉었다. 바람 한 점에도 몰아치는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농도 짙은 향기였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그러자 붉디 붉은 꽃의 색은 핏빛으로 변모하고, 여전히 부는 바람 따라 내게 도달하는 향기는 자욱한 피향기였다. 발 아래를 적시는 붉은 피.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지만 피를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로 본다. 주위는 온통 시체 뿐이라, 어디선가 아득히 먼, 비명소리가… 나는 눈을 감는다. 들려오는 소리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음을 알기에 되려 안온하다. 그것을 수긍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시체가 쌓여간다. 나 또한 피로 흠뻑 젖어 간다. 눈을 뜬다. 그리고,

  유.

  너 또한 그곳에 있었다.

  시야가 무엇 때문인지 거뭇하게 물들었다. 피일 것이라고, 짐작했으나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비명소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거세게 울었고 나는 내딛는 걸음마다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웠다. 위태로운 걸음 탓에 제대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발을 채이는 무언가에 그제야 손 뻗으면, 닿는 것은 딱딱한 살갗. 나는 문득 텅 빈 공허를 느낀다. 뼈를 사무치게 울리는, 그러나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태어날 적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너로 인해 잊었던 모양이었다. 누이가 어떻게 웃었더라. 문득 기억해보려 해도 공허는 모든 것을 뒤덮었다. 어떤 손짓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래알 마냥 흩어진다. 그저 남은 것은.

  수언.

  다정스레 날 부르는……

  유의 손을 그러모아 입 맞춘다. 누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흩어지는 기억을 붙들려 했으나 산산히 조각난 그것들이 돌아올 리 없었다. 내 발 아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유의 손이 힘없이 떨궈진다. 끝 없는 공허.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눈을 떴다. 꿈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꿈이고, 또 어디까지가 현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