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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0 혼, 안개
2016. 1. 18. 00:26 category : 2015

 시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을 걸어왔다. 문득 뒤돌아보면 안개 자욱한 눈길을 홀로 걸어왔다는 걸 절감한다. 때로는 둘이었던 적도 있으나 혼자였던 때가 더 많았으므로, 오히려 그것이 더 낫다 여겨졌다. 괜히 정을 두고 마음을 두어봤자 상처만 줄 따름이라, 마음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삭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삭히는 것이 어려우면 한 번 토해내면 그만이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떠나보내는 것 역시 쉽다. 이제는 무언가를 담아둘 것이 아니라 보내줄 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살다보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므로.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점이.

  찰나의 장난에 의한 우연이었고, 어여쁜 아이들이었다. 끝을 장식하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어 하나하나 다 잊지 않고자 했다. 다음에도 만나리라는 약속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라, 축제의 끝을 보는 동시에 길의 끝이 머지 않음을 직감한다. 약속의 징표로 남겨둔 은비녀는 누가 가져가더라도, 혹은 그저 내버려두더라도 좋을 듯 싶었다. 흔적 하나 쯤은 남겨두어도 괜찮겠지. 아주 작은 욕심이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인간으로 완벽히 둔갑하는 방법도 깨우치지 못해 귀와 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돌아다니던 자신을 숨겨주고 이름까지 쥐어주었던 아이였다. 요괴와 인간의 시간이 같이 흘러갈 리 없으므로 결국에는 보내주어야 했으나 혼, 하고 부르던 목소리와 웃음 만큼은 마지막까지도 선명하여 부질 없는 후회와 미련이 낮게 가라 앉는다. 하얀 자작나무 가운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그리 편히 웃은 건 오랜만이라 정말 기뻤지.

  ……그러니 슬퍼하지 말렴. 즐거운 것만 기억해야지 않겠니.


 여우불 여러 개가 곧 사방으로 흩어지고, 마침내 남은 건 안개와 새하얀 눈송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