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칼리반은 엘리스에게 공식적인 전서 하나를 보냈다. 종이 세 장을 조금 넘겼을 정도로 길지만 논리적이고, 우아한 문장들로 채워진 전서를 요약하자면, 엘리스 카밀라 드 헤레스가 아닌 본인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거절할 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중한 어투였으나 그것이 선포나 다름 없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왕궁은 분노했으나 그에 대한 대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모양이었다. 일찍이 왕궁에서 떨어져 있던 칼리반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전서를 보내라고 명한 직후, 병력의 일부를 엘리스를 열렬히 지지하나 비교적 세력이 약한 가문에 보내어 함락시켰으니, 엘리스는 몰라도 그녀의 참모인 이든은 속이 뒤집어지고도 남으리라. 적어도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먼저 선수를 쳤으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칼리반은 딘의 말을 떠올리며 빈 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전쟁의 시작은 적을 끌어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드디어 미쳤나, 칼리반?"
무어라 언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차 없이 날아왔다. 제1왕자에 대한 예의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모양새였으나, 4대 가문의 가주이자 그의 친우인 아서 페르타였으므로 그려려니 하게 되었다. 칼리반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슬쩍 웃었다. 평소 성격이 워낙 지랄 맞아 욕을 듣지 않은 것이 의외일 정도였다.
비어 있던 테이블의 건너편에 비로소 아서의 얼굴이 보였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 것이, 금방이라도 술병을 던져버릴 태세라 칼리반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가주가 되어야겠다며 네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죽인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젠장, 그 인간은 가문을 망치고 있었다고! 묵인한 사람이 누군데! 그거랑 이거랑 같아, 이 새끼야!"
"음, 그래서 네가 나와 그나마 오래 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아서."
기어코 술병이 칼리반의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칼리반은 거친 숨을 고르는 아서를 보며,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 술로 입술을 축였다.
"왕족 상해죄로 목이 잘리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싶은 거야?"
"안 맞을 것 알고 던진 거니 입 다물어."
아서는 욕을 내뱉으며 칼리반의 잔을 반강제로 뺏어 단번에 마셨다. 칼리반은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서 페르타. 내 이름이 뭐였지?"
"…정말로 미쳤나? 칼리반 헤레스잖아."
"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네가 중간에 빼먹은 그건데."
"그건 내가 못 부르잖아. 왜, 갑자기?"
"칼리반 페르난 드 헤레스. 페르난은 2대 왕의 이름이야."
그랬던가. 아서가 어렸을 적 배웠던 나라의 까마득한 역사를 더듬는 사이, 칼리반은 잔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형을 죽여 왕위를 찬탈한 자의 이름이라고."
"……."
"사람은 이름에 따라 살아간다고 하니, 이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
아서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벌렸다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굳게 다물린 잇새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미친 새끼……."
"칭찬으로 듣지. 그러지 말고, 나랑 손 잡는 게 어때, 페르타 공."
"돌았나? 난 나라 안에선 칼 안 들어. 끼어든다고 해도 너한텐 안 가!"
"유감이군. 크게 도움 될 텐데."
페르타 가문은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띄는 것으로 유명하나 나라의 4대 가문 중 가장 충성도가 강하므로, 당연한 대답이기도 했다. 누가 왕이 되든 페르타는, 그리고 아서는 그를 따를 것이다. 자신이 그의 친우인 것과는 별개로 나라의 안위에 방해가 된다면 서슴없이 칼을 들겠지. 어쩌면 마지막으로 자신을 죽이는 건 아서일 지도 모른다. 지금 침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서 페르타가 칼리반을 배려하는 것임을 칼리반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적어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으나, 엘리스는 그의 선전포고를 익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전이 발발하리라는 사실도. 엘리스는 약속된 승자였고, 칼리반은 약속된 패자였다. 이 전쟁의 끝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칼리반의 죽음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아서가 길길이 날뛰는 이유는 그때문이었다. 성격은 포악해도 사태를 냉정히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이므로.
딘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칼리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화살은 이미 활을 떠났으니, 이제 내게 남은 건 하나 뿐이야. 과녁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대꾸없이 칼리반을 보던 아서는 마지막 술 한 방울이 혀 끝에 닿고 나서야 중얼거렸다.
"과녁에서 등을 돌리고 활을 쏜 주제에."
전쟁이 끝나기 전에, …….
칼리반은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빙판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한 고요함이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