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태어난 곳은 항상 모래바람이 불었다. 모래 바람이 불면 눈을 감지 않고서는 길을 걸을 수가 없었고, 설령 눈을 감고 지난다고 해도 머리를 비롯한 속눈썹과 눈, 옷자락에서 퍼석거리는 모래가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모래 바람은 주기적으로 왔기 때문에 마을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어른들은 그것이 올 때 빗장을 걸고 아이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며 그네들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나가면 모래 귀신한테 잡아 먹힐 거야.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은 그것을 철떡같이 믿어 두려워 했고, '모래 귀신'이라는 존재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는 유용한 것이었다. 물론 늦어도 열 살이 넘어서는 효력이 없었지만. 그것은 아이들의 순진함이 사라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모래 바람이 불고 난 뒤, 밖을 나가보면 부드러운 모래알들이 바닥과 창가에 내려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는 먼지가 가시지 않아 기침을 하기 일쑤였지만, 나는 곱디 고운 모래 알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부모님 몰래 그것을 모으고 모아 아꼈던 유리병에 담았을 정도였다. 손에 퍼담으면 반 이상은 흘러 내려 버리는 부드러움과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예쁜 색채. 아, 그것은 어렸을 때만의 얘기는 아닌 모양이다. 지금도 생각하노라면 옅은 황홀감과 함께 웃음을 짓게 하니까.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유리병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까지 모래알이 담겨 있었는지 쉬이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글픈 일이었다.
열 아홉, 부모님과 나, 그리고 유리병이 있던 집에는 이제 부모님과 유리병 뿐이었다. 창가에 놓여 찬란하게 빛나던 그것을 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떠나보냈다.
2.
도시에 와서 내가 처음이자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는 집은 문을 열면 바로 계단이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그 계단을 오르자마자 있는 곳으로, 하숙생의 신분으로 왔을 때나 집주인의 신분으로 있을 때나 똑같다. 떠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굳이 서술하자면 그래,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에서의 나의 방과 꼭 닮았다. 계단을 오르고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이는 방문을 열면 보이는 퍽 넓은 창문과 그 바로 아래의 고목 책상, 문에서 오른쪽에 있는 낡은 침대와 같은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의 구조는 바뀌고 나 또한 늙었지만 처음 보았던 방의 이미지 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책상 대신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그럴 때마다 내가 늙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것을 몇 번이고 곱씹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을 글로 밖에 남길 수 없는 내 신세가 퍽 처량하다. 그림으로라도 그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너무나 늙었고 더 이상의 종이는 구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나는 안다. 아래 크게 틀어놓은 TV에서 흘러 나오는 노이즈는 정겹기까지 하다. 며칠이었나? 아니, 몇 달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잊는다는 것은 내가 늙어 간다는 또 다른 반증이라 나는 쓰게 웃는다. 나는 다만 햇빛을 통하여 낮과 밤을 헤아린다. 시끌벅적하던 마을은 죽은 듯 조용하다.
마지막의 마지막을 보고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모든 것은 끊겼고, 나또한 희미하다. 그거면 충분하다.
희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날의 내가 문을 연다. 황금빛 찬란한 모래가 쏟아진다. 반짝거린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그것은 이제 집을 삼킨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니, 되려 아늑한 것 같다. 모래에서 태어난 나는 모래로 돌아간다. 나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