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다 뭐다 해도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겨울은 쉽게 끝나지 않고 봄은 멀게만 느껴진다. 쿠로오 테츠로는 몇 해 전에 산 코트의 소매가 부쩍 짧아졌다는 걸 느꼈다. 작년만 해도 코트를 입고 장갑을 끼면 바람을 막기에 제격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찬 바람이 슬그머니 빈 틈을 찾아 들어온다. 새로 사야 하나, 싶으면서도 어딘가 아쉬워 말하는 걸 미뤘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여전히 어중간한 길이의 코트다. 서로의 이니셜이 박힌 팔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내 창 밖을 바라보던 켄마가 쿠로오의 손목을 잠깐 보았다. 코트, 감기 걸려, 쿠로. 쿠로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었다. 켄마, 그러다 머리 부딪힌다.
쿠로오의 졸업을 코 앞에 둔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건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겨울이었고,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낭만이라면 낭만이고 치기라면 치기일 것이다. 어쨌거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켄마, 바다 보러 갈까, 라고 물은 것에, 켄마가 응, 이라고 대답해준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다른 건 전부 상관 없었다. 쿠로오는 서로가 서로 뿐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벌써부터 바다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30분 뒤에 정차한다는 방송이 연이어 계속되었다. 쿠로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켄마는 여전히, 아까와 같은 자세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켄마, 지갑."
"주머니에."
"빼먹은 거 없지?"
"내가 애도 아니고…."
그래도 낮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쿠로오는 대꾸 없이 웃었다. 기차에서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바다 향기가 쏟아졌다.
대책 없이 시작한 여행인 만큼 계획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급하게 잡은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둔 뒤, 쿠로오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었고, 켄마는 한 걸음 뒤에서 낡은 운동화에 감기는 모래알을 바라보며 걸었다. 겨울에 바닷가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철썩거리며 들어왔다가 나가는 바다 위로 부는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팔찌를 건드리는 바람에 계속 손목이 시렸다. 코트가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팔찌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켄마를 바라 보았다. 새삼스럽게 침묵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켄마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년 전이나 지금이나 켄마는 나보다 더 작구나. 굳이 이 년 전을 생각한 건 그때가 쿠로오 테츠로와 코즈메 켄마가 연인이 된 것과 동시에,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맞춘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낭만, 혹은 치기였다. 대수롭지 않은 제안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며칠 뒤 시간을 맞춰 서로의 이니셜을 새긴 팔찌를 가져 왔으나 착용한 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으므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했다. 서로를 연인이 아닌 소꿉친구로 소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쿠로오는 가끔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팔찌를 꺼내보고 팔목에 올렸다가, 체인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넣어두었다. 이 년 동안 거의 매 달마다 그랬다. 켄마는, 모르겠다,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걸 섭섭해 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 년 사이 두 사람은 무럭무럭 자랐다. 적당히 널널했던 팔찌가 손목을 조일 정도로. 그게 못내 아쉬웠다.
"춥다."
켄마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고개를 돌렸다. 켄마의 코 끝이 빨개져 있었다. 어느새 해안가의 끝이다.
"그러게. 돌아갈까?"
"응."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는 걸 바라보다 주머니 속의 손을 꺼내 내밀었다. 코트의 소매가 올라가 차가운 공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켄마는 쿠로오의 손목을, 정확히는 팔찌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잡았다. 쿠로오는 씩 웃으며 손을 깍지 껴 잡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얼핏 드러난 켄마의 손목에 그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아마도 그의 이름이 적혔을 것이 분명한 팔찌가 보였다. 켄마의 손은 쿠로오의 손보다 더 차가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켄마의 얼굴이 붉어진 게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해안가를 벗어나기 직전, 켄마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쿠로오가 고개를 돌렸으나 켄마의 시선은 신발의 끝을 향해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은 금세 사라진다.
"버스 끊길 것 같아."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냥, 그럴 것 같다고."
잠깐의 생각 끝에 쿠로오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켄마는 목도리에 제 얼굴을 깊이 묻었다. 그래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정도야 뭐. 쿠로, 그만 웃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쿠로오는 웃음을 멈췄으나 그럼에도 켄마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다. 조금 더 놀려줄까,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켄마."
"…왜?"
"돌아가면, 팔찌 다시 맞출까."
켄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잡은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