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guest admin
[랑야방/예왕] 마지막 독백 (160614)
2017. 1. 16. 23:56 category : slash

  감옥에서의 시간은 다른 곳보다 더디 흐르는 것 같기도 했고 빠르게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달리 흐르는 곳이라고 하면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느껴지는 흐름이 달랐으므로 소경환은 이미 시간 가늠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왕비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하고 끌려간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부를 이도 없다. 꾸준히 부황을 보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으나 반쯤은 그가 자신을 보러올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청한 것도 며칠 전의 일이라,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제 목소리가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벽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은 정처 없이 흘러가 잊은 줄 알았던 과거에까지 닿는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 흘려보냈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떠올라 광인처럼 실소를 흘리게 될 때도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것이 기왕, 소경우에 대한 기억이었다. 경우 형님. 멀디 멀어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마냥 그런 것도 아니라 납득은 갔다. 소경우는 감옥에서, 그것도 그의 눈 앞에서 독약을 먹고 죽었으니.

  아비는 아들을 모르고 아들은 아비를 모르는 구나.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경환은 그 말을 부황에게 전하지 않았으므로 기왕의 마지막 유언은 영영 사라진 셈이었다. 어째서 그 말을 전하지 않았을까. 우습게도 활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부황에게 진위를 물었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기왕의 유언이었다. 경환은 매장소의 힐난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그 말을 잊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간직하고 있었는가. 떠나보내지도 못한 채로 어째서 그 말에 속박되어 살았는지.


  형님.


  경환은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비현실적인 공간이라 누군가 답해줄 것만 같았는데,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철창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에 먼지가 아롱거렸다. 기왕이 반역죄로 몰려 폐위되기 직전까지도 경환은 자신이 황위를 쥘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입궁하였을 때 기왕은, 소경우는, 경우 형님은 이미 성인이었고 차후의 황제로서 그 입지가 공고했다. 이따금 황제와 의견이 충돌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긴 하였으나 그것이 문제가 될 거라 여긴 이는 별로 없었다. 경환은…… 그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간혹 경환이 황제와 가장 닮았으니 황위에 적합하다며 에둘러 권유하는 이는 있었으나 그는 매번 거절했다. 그 역시 기왕이 황제가 될 거라 의심치 않았으며 애꿎은 알력 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기왕을 존경하고, 선망, 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확신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은 감정이 퇴색되고 기억이 흐려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형님.

  일전에 제게 그러셨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건 있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단 하나,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때 만큼 고요하고 평온할 때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감히 행복했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아무리 부와 권력을 두 손 가득 쥐더라도 이따금 헛헛해지는 감정을 따라가다보면 늘 과거를 향하게 되었다. 다시는 찾을 수 없고 돌아 갈 수 없으며,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도, 그곳에는 막연한 그리움이 있었고 서글픔이 있었다.

  경환아,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하였는가. 이 사람이라면 황제가 되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한 번 쯤은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안심하여 서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나날들이 있지 않았던가. 하잘 것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평온히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


  지나친 욕심은 너를 잡아 먹을 테니, 부디 조심하라고,

  그리 말하신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경우 형님.


  형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경환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그의 말은 대개 옳은 방향이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서글픈 것은 그 말을 지나치게 늦게 깨달았다는 점일 것이다. 경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때문에 욕심을 부렸으며 그 대가가 이러하였다. 비참하지 않다면 거짓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거짓이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이것이 당연한 결과였나, 싶었다.

  마지막이므로 고백하건대 기왕이 반란을 조장했으리란 말을 믿은 적은 없었다. 적염군의 반란 역시 사실일 거라 여기지 않았다. 다만 세간이 그리 말하고 부황이 그리 말하므로, 또 하잘 것 없는 욕심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거니 하였다. 이제 와서는 그것이 우습기 그지 없었다. 형님. 경우 형님.


  제가 무어라 말했다면 무엇이 달라졌겠습니까.

  제가 무언갈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형님.


  절규에 가까운 읊조림에도 사위는 고요하다. 기왕은 평생 자신의 꿈 속에 나타난 적 없었고 그 역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나 평생을 그의 말에 속박되어 살았고 마지막 역시 그의 유언을 읊조리고 가는 것을.


  당신이 황제가 된 세상은…….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끝내 답 없을 물음만 수 없이 쌓여갔다. 경환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