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매장소가 잠에 깊이 든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약의 힘을 빌리거나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하듯 눈을 감을 때에만 의식이 단절되었고, 그마저도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가 피곤함이 가시는 때가 없었다. 매장소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였으므로 그는 그것에 불만을 여긴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감내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사실 딱 한 번 깊이 잠 들었을 때 꾸었던 악몽보다는 나았다. 늘상 희미하게 웃는 매장소를 보며 사람들은 강좌맹의 종주는 두려워 하는 것이 없다더라 하였으나 그 자신도 사람인 만큼 두려운 것은 있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망령에게 악몽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악몽은 언제나 자각몽이되 상황은 매번 달랐다. 꿈 속에서의 그는 어린 임수가 되거나 매장소가 되었고, 혹은 기왕이 되거나 정왕이 되거나 적염군의 장수가 되었다. 때로는 주검을 보지도 못한 어머니일 때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라 강조했던 아버지일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으나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몸이 불타오르고 산산조각 난 유리에 베인 듯 가슴 저미는 고통만큼은.
장소.
볼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그는 느리게 눈을 떴다. 꿈은 깊지 않았으나 악몽은 언제나 질척하게 들러 붙는 경향이 있었다. 말을 찾지 못하고 한참 린신을 바라보고 있자, 린신은 손을 떼고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장소, 하고. 그 이름을 가진 것이 몇 해가 지났음에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따금 꿈에서 깬 자신을 보는 린신의 시선처럼. 그의 눈은 대개 바람처럼 요란하거나 차게 타오르는 불과 같았는데, 매장소를 깨울 때면 항상 고요한 수면과 같은 눈을 했다. 매장소는 그 시선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의미를 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깜빡 졸았나보군.
잠시 각주와 얘기를 하고 올 테니 기다리라는 린신의 말을 들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깊고 깊은 숲을 바라보다 깜빡 잠에 든 모양이었다. 요 며칠 금릉의 정세를 파악하느라 도통 쉬질 못했으니 그럴 만 했다. 얼핏 머쓱한 얼굴을 하는 매장소에게 린신은 가볍게 혀를 차고 소매 속에서 서신 하나와 작은 병을 건넸다. 아마 각주가 전한 물건일 터였다. 매장소가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으나 린신은 잠시 멈칫하고 쉽사리 그것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불퉁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의 손목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매장소는 한 박자 늦게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자네는 너무 모든 것을 자네 탓으로 여기는 것 같아.
‘매장소’가 되기 전 제 몸에 상처를 낸 흔적이 손목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얼마 뒤면 감쪽 같이 사라질 것이나 상처가 아문 지 고작 세 달이 흘렀으니 아직까지는 눈에 선연히 보이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린신이니 보이지 않을 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 매장소는 잠시 그 흔적에 눈이 팔려 대답할 때를 놓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짐승과 같던 때였다. 임수는……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린신.
내가 죄책감을? 왜?
매장소는 말 없이 웃으며 팔을 거두었다. 소매가 내려가 흔적을 감춘다. 린신은 짜증 섞인 숨을 길게 내뱉고 비류를 불러 약과 서신을 챙기게 했다. 한참 잘 놀고 있던 비류는 영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으나 몇 번 심통을 부린 것이 전부였다. 눈짓을 하자 금세 수풀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
이 이름을 주고 생을 이어준 것이 자네잖나.
린신은 눈을 감고 기둥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야말로 짐승과 같던 때였다…… 죽음에서 돌아온 임수는 그랬다. 의식이 돌아오면 날카로운 물건을 찾았고 날붙이를 손에 잡으면 끊임 없이 자신의 상처를 쑤셨다. 날붙이가 없으면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헤치고 상처를 긁어댔다. 임수가 머물렀던 방에서는 피 비린내가 가시는 때가 없었으므로 혹자는 죽이는 것이 더 옳았을 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수많은 환자를 대하고 죽음을 보았으나 그토록 죽음과 가까이 다가간 자를 본 적이 있던가. 린신은 감히 그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린신은 이따금 각주의 물음을 생각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린신.
그래. 내가 그 이름과 그 삶을 주었지, 장소.
…….
내가 그랬어. 내가 자네에게 삶을 주는 동시에 앗아갔어.
린신은 감은 눈을 떴다. 매장소는 다시 한 번 고요한 수면을 떠올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죄책감이라고 했나? 아니지, 장소. 이건 죄책감이 아니야.
…….
이게 무엇인지 자네는 알고 싶지 않겠지. 그러니 죄책감이라고 믿게.
린신이 느리게 손을 뻗었으나 매장소는 가만히 있었다. 보았으나 보지 않은 척, 들었으나 듣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매장소의 특기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묵인하고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제 몸에 상처를 내는 짓은 그만두었으나 피 비린내는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임수의 것인지, 아버지의 것인지, 아니면 적염군 장수의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린신의 손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힘 없이 떨어졌다.
죄책감과 책임감에 짓눌린 건 내가 아닌 자네지. 매장소는 그러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러니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매장소는 언제나 그 피 비린내를 좇았고 오로지 하나 만을 위해 살았다. 잠에 들지 않아도 악몽은 진득하게 늘러 붙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불에 타는 매령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시체가…… 그리고 눈을 뜨면, 린신은 언제나 고요한 눈을 하고 매장소를 바라본다. 매장소는 린신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린신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네, 린신.
린신은 손을 완전히 거두고 웃었다.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