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다 보면 날짜 감각은 고사하고 시간 감각도 상실하는 법이다. 지혜서는 본인의 일을 제법 달갑게 여겼지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이방인을 "대응"하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 것이지, 일의 본질을 즐겁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 나라를 전복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일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즐겁긴 하지. 지혜서는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정보를 정리하여 보관하며 생각했다. 물론 계획은 완벽하게 세워두었니 그쪽도 건드릴 건 없었다.
어쨌거나 지혜서가 시간을 인지하는 건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정보가 업데이트 될 때, 두 번째는 그녀의…… 애인이 올 때. 애인이라. 지혜서는 팔을 쭉 뻗으며 낯선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그리고 정정했다. 애인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 으로.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일 안 하고 뭐해요?"
"한 씨 기다렸죠. 멀쩡한 문 냅두고 창문으로 들어오기는."
"몰래 오라던 사람이 누군데."
"그건 들키기 전 이야기고요."
고양이 같은 눈매가 잠깐 가늘어지더니 곧 고개가 홱 돌아갔다. 비스듬히 열린 창문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린 한은 빠른 걸음으로 소파로 가 앉았다. 지혜서는 고개를 틀어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 시라.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었으나 썩 나쁘지 않았다.
"가져 오라던 건 가져왔어요?"
"여기." 품 속에서 장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한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읊조렸다. "…그리고 제발, 위험한 게 있으면 있다고 얘기 좀 해줄래요?"
장부를 곁눈질로 확인한 지혜서는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얘기 안 했었나?"
작게 욕을 읊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한에게 부탁했던 물건은 어떤 고위층 간부가 가지고 있는 장부였고, 그 간부는 장부를 애지중지 여기는 덕분에 온갖 함정을 설치해두었을 것이다. 한은 아무래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번엔 진짜로 잊어버린 건데. 아무리 한을 골리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을 일부러 말하지 않을 만큼 성질이 나쁘지는 않으니까. …아마도.
얼핏 보니 옷자락이 찢어지고 여러 곳이 다친 것 같았다. 한은 남들보다 배로 높은 자존심 때문에 아무리 크게 다쳐도 끝까지 얘기를 하지 않았고, 때문에 상처를 알아차리는 건 늘 지혜서의 몫이었다. 이따금 눈치가 빠른 게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 씨."
"…왜요?"
"이리 와 봐요."
물론 그녀가 다쳤다고 해서 속이 상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우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지혜서는 그런 감정들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다만 기분이 나쁘기는 했다. 그건 일종의 소유욕과 집착에 가까울 것이다. 본인의 것에 누군가가 손을 대었다는 불쾌함이나.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걸어오는 한을 보며 지혜서는 턱을 괴고 웃었다. 이걸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쳤으면서 왜 다쳤다고 얘길 안 해요?"
"……."
"하여튼 고집하고는."
지혜서는 가볍게 혀를 차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겨 무릎에 앉게 했다. 작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부루퉁한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배우지 못한 감정 중에는 사랑 역시 포함되었으므로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혜서는 제법 가까이에 있는 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지혜서는 어쨌거나 한을 원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이마와 볼에 생채기, 팔은 가볍게 금이 갔거나 강하게 얻어 맞은 것 같고… 발목은 삐었네요."
"……어차피 말 안 해도 다 알잖아요."
"직접 말해주면 어디가 덧 나나."
"윽."
볼에 입을 맞추는 동시에 상처를 가볍게 핥자 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비린 맛에 입을 뗐다가 다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스해도 돼요?"
"언제는 물어보고 했나."
"음."
적나라한 질문을 던지는 건 지혜서의 고약한 버릇 중에 하나다. 한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시선을 틀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란 표정이라 되레 즐거워졌다. 지혜서는 한의 허리를 잡아 자세를 조금 바꾸어,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씨, 나한테 키스해봐요."
"내가 왜요."
"받고 싶으니까."
"미친…."
"안 해줄 거예요?"
내가 왜 이런 사람 곁에 있을까, 라고 말하는 듯한 한의 표정에도 지혜서는 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보았다. 한은 다시 한 번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지혜서는 그런 그녀를 어쩌면 평생동안 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어쩌면,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을 거라 단정 지었다.